배구(排球, Volleyball)는 각 6명으로 구성된 두 팀이 네트를 사이에 두고 공을 자신의 진영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블로킹 빼고) 3번 안에 서로 쳐 넘기며 상대방 코트 안에 떨어뜨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구기 스포츠다. 경기장의 규격은 18m × 9m며 남녀 간의 차이는 네트의 높이 차이다.
배구의 역사
1895년 미국 메사추세츠주 홀리오크(Holyoke)시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이보다 몇년 앞서 창시된 농구가 중년 남성이 하기에는 몸싸움이 거칠다고 보아 한층 정적인 동선에 따라 YMCA 체육부장 윌리엄 모건(William G. Morgan)이 창안했다.당초에는 5명이 한 팀을 이뤄 21점제로 시작되었으나 1918년 6인제, 15점제, 로테이션제라는 6인제 국제규칙이 확립되었다. 맨 처음 공인대회로 개최된 것은 1922년 YMCA선수권대회였다.
소비에트 배구협회에서 1925년 조직제로 처음 창설했다. 1947년에는 15개국에 의한 FIVB(국제배구연맹)이 파리에서 창설되었고, 4년에 1번씩 세계선수권대회와 월드컵을 개최하고 있다. 1961, 1962년의 IOC(국제올림픽 위원회) 총회에서 남자, 여자배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었고, 1964 도쿄 올림픽부터 남녀경기로 등장했다.
한국에서는 1916년 서울 중앙 YMCA의 미국인 선교사 반하트가 회원들에게 정식으로 지도한 것이 처음이다.
배구는 무조건 끝장승부이며 듀스까지 가도 2점까지는 가야 한다.
야구, 미식축구와 같이 미국을 대표하는 구기종목이지만, 오히려 유럽과 중남미 아시아에서 인기가 많았다. 본고장 미국에서는 풋볼과 야구와 달리 전통적인 프로리그가 없었고,인기에서도 밀린 탓에 미국에서는 배구 프로리그가 없었다 한국에서야 배구가 농구를 능가하는 겨울스포츠로 알아주지만 미국에서는 미식축구와 야구, 아이스하키가 인기가 많았다 다만 그동안 미국에서는 대학배구 인기는 많았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미국에서도 프로배구가 출범했다
크게 두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는데, 첫째는 남자 경기와는 차별화된 관전의 즐거움에 있다. 이 것은 테니스와 매우 유사한데 남자 배구와 테니스가 강력한 서브와 스파이크(스트록)을 바탕으로 파워풀한 퍼포먼스를 보여 준다면 여자 배구와 테니스는 리시브(리턴) & 랠리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남자 경기와는 차별화된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선수풀에 있다. 서구권을 기준으로 남자 프로 운동 선수는 메이저 종목인 축구, 핸드볼, 미식풋볼, 야구, 아이스하키, 테니스 등을 먼저 선택하기 때문에 인기나 연봉 등에서 남자 배구는 선수풀이 상대적으로 얇을 수 밖에 없다. 반면에 여자 운동선수에게는 배구가 테니스, 골프 등과 더불어 메이저 종목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선수풀이 매우 두텁다. 서구권에서는 비치발리볼을 포함한 배구가 여자들에게 생활 스포츠로 자리매김해 있고 미국에선 NCAA 여자 배구 리그를 통해서 매년 유망주들이 쏟아져 나오는 형국이다. 손오공티비 이러한 두터운 선수풀을 바탕으로 꾸준한 퍼포먼스를 보여 주기 때문에 특히 엘리트만 뽑아 놓은 국제대회에서 여자 배구의 인기는 모든 여자 스포츠를 통틀어서도 메이저 종목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스포츠 배구의 발전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배구는 중고등학교 체육시간에 배우는 그 간단한 서브, 손오공티비즉 언더 서브 혹은 플로터 서브를 넣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서브 범실이나 서브 득점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서브는 경기를 진행시키기 위한 서비스 개념이었다. 그렇게 서브를 받으면 완벽한 리시브를 통해 세터 머리 위로 정확하게 전달됐고, 이후 약속된 패턴 플레이로 경기를 했다. 센터에게 속공을 주는 척 하면서 시간차를 쓸 것인가, 아니면 곧바로 센터에게 속공을 연결시킬 것인가, 상대 센터를 속이며 백 어택으로 갈 것인가, 손오공티비 아니면 평범한 오픈 공격을 할 것인가. 1964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일본 여자배구대표팀이 선보인 시간차 공격의 등장 이후로, 배구는 전형적인 패턴플레이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한국이나 일본처럼 조직력을 우선시하는 국가가 배구 강국이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 중후반대에 본격적으로 스파이크 서브가 나타나면서, 세계 배구사는 크게 변하게 된다. 스파이크 서브는 1978년도에 중국 선수가 처음 개발/시도했지만 현재와 같은 강서브보다 약한 위력이었으며 그것도 어쩌다 한 두 번 시도하는 정도였다. 1981년 이 모습을 보고 현재와 같은 스파이크 서브로 발전시켜 매 게임 사용하기 시작한 선수는 캐나다의 존 배럿(John Barrett)이다.그 후 스파이크 서브가 일반화된 건 1984년 올림픽에서 브라질팀이 사용하고서부터이다. 국내 최초로 완전히 개인전술화한 선수는 바로 장윤창 선수.
1980년대까지의 서브는 단지 경기 진행의 개념으로 생각되었다. 일본야구중계 당시 규정 때문이기도 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테니스처럼 서브가 상대 코트로 클린하게 넘어가야 했으며, 서브된 공이 네트에 스치기만 해도 무조건 범실이었다.아무래도 스파이크 서브는 정확도가 떨어지는데, 네트에 맞고 넘어가도 범실이다 보니 웬만큼 정확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스파이크 서브를 넣는다는 것은 반쯤은 그냥 서브권을 넘겨주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당시에는 서브 포인트 시스템이었으므로 서브권 자체가 소중했으며, 이를 그냥 넘겨 준다는 것은 점수를 올릴 기회를 넘겨 준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래서 쉽사리 스파이크 서브를 시도하지 못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공을 높게 띄우더니 마치 백 어택을 하듯 강력한 스파이크로 서브를 넣는 개념인 스파이크 서브는 상대의 리시브 라인을 초토화시켰고, 이전처럼 약속된 패턴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 리시브를 해도 세터 머리 위로 제대로 올려 놓지 못 하고,리시브는 짧아지고, 결국 패턴 플레이가 실종되며 단순한 좌우 사이드 오픈 공격 위주로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1980년대에 스파이크 서브를 다른 많은 나라들도 시작하게 되자, 문제는 서브 리시브 라인을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서브가 서비스 개념에서 스파이크 서브로 넘어가자, 일본야구중계 앞서 설명한 대로 리시브 라인이 초토화되고 제대로 된 패턴 플레이를 구사하기 어려워졌다.
이 때 현대배구에서 브라질의 베르나르두 헤젠지 감독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미국의 덕 빌 감독이 등장한다. 그는 ‘2인 수비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정상적인 3명의 윙 플레이어를 2명의 레프트(아웃사이드)와 1명의 라이트(아포짓)으로 구분하고, 후위에 있는 레프트와 센터(미들 블로커) 1명에게 리시브를 전담시킴으로써 라이트를 리시브에 제외시켜 공격에만 전념할 수 있게끔 만드는 시스템이다. 라이트를 리시브에서 제외시키는 이유는 그 당시 선수들의 수비력으로 스파이크 서브를 리시브하고 곧바로 공격에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전위 후위에 1명씩 있으며 코트 왼쪽에 있는 레프트 윙 리시버와 달리 서브와 동시에 수비에서 빠져 토스를 준비하는 세터와 대각으로 돌아가는 라이트 윙 리시버의 위치를 활용해, 세터와 같은 동선으로 리시브에서 빼내서 세터가 불안한 리시브 때문에 패턴 플레이를 진행하지 못할 경우 미리 약속된 위치의 라이트에게 오픈이라도 올려놓기 위해 수비를 면제해 주는 것. 일본야구중계 나중에는 수비 전문선수 리베로가 등장해 센터(미들 블로커)가 후위로 가면 리베로와 교체되는 식으로 바뀐다.
그러나 이런 2인 수비 시스템으로도 스파이크 서브를 제대로 막아내지는 못 했다. 1990년대 대한민국이 월드리그에 출전했던 경기를 본 올드팬들이라면 알겠지만, 세계구급 공격수들의 스파이크 서브는 받는 것조차 버거웠을 정도. 스파이크 서브는 갈수록 발전해 나가고, 결국 이 걸 받지 못 하는 팀은 ‘불안한 리시브 → 불안한 리시브로 인해 패턴 플레이를 못 하는 토스는 주공격수를 향한 오픈 토스 → 주공격수가 상대 블로킹을 뚫고 어떻게든 마무리’ 라는, 완전히 경기의 기본 조립이 무너진 수준의 뻥배구 양상이 가속화 됐다.
그래서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배구 경기 전체의 흐름을 늦추는 쪽으로 방향성을 정했고, 리베로, 공인구의 공기압 약화,랠리 포인트 시스템,서브의 네트 터치 인정 등 여러가지 제도를 도입하여 대응책을 세우기도 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사람이 앞서 설명한 스피드 배구의 시초인 브라질의 베르나르두 헤젠지[22] 감독이다. 덕 빌이 스파이크 서브로 인해 초토화된 리시브 라인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헤젠지는 이전 시대처럼 완벽한 리시브에 이은 정교한 패턴 플레이가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찾았는데, 퍼펙트 리시브를 바라지 않고 어쨌든 리시브만 하면 세터가 양쪽 윙 스파이커에게 빠르게 토스를 쏴 주는 것이다. 스피드 배구의 핵심은 퀵 오픈(C퀵)인데, 유튜브에서 브라질 국대들의 스페셜 영상만 봐도 확인할 수 있다. 토스가 직선으로 빠르게 후위로 날아가는 ‘후위 시간차 공격(파이프 PIPE)’이라는 무시무시한 공격패턴을 볼 수 있다.
1999년FIVB에서 랠리 포인트 제도가 도입되고 헤젠지 감독 식의 스피드 배구가 세계배구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을 당시, 한국 남자배구는 2005년까지 월드리그에 불참했던 관계로 이러한 세계배구의 흐름에 철저하게 뒤처진 7~80년대 조직배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 어택라인에 겨우 올라오는 짧은 리시브 덕분에 예전과 같은 패턴 플레이는 보기 어려워져 공격이 단순화되어 가는 단점과, 세터가 디그에 참여한다던가 해서 2단 토스를 못 올리는 상황이 되면 예전의 뻥배구가 다시 나타나는 단점이 있지만, 현대배구에서의 표본은 어찌 됐든 간에 스피드 배구다. 리시브를 제대로 해 줘서 세터의 손끝으로 경기를 조립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레프트들은 코트에서 오픈과 패턴 플레이 및 중앙 후위 공격 등 공격에도 참여하기 시작했고, 라이트와는 다르게 공격과 수비 모두 참여해야 하는 만능 선수가 돼 버렸다. 수비 포메이션상 레프트 2명은 라이트(아포짓)와 전위의 센터를 보호하며 리시브를 받게 된다. 사실상 레프트(아웃사이드)의 개인전술과 역량, 강철같은 체력이 중요시되는 시대인 것.
과거의 조직력 배구와 현대 스피드 배구의 차이점을 최대한 짧게 설명한다면, 조직력 배구는 세터의 토스 손놀림과 팀원들의 약속된 움직임으로 상대 블로킹을 따돌렸지만, 스피드 배구는 세터의 토스 손놀림이 사라지고 팀원들이 전부 각자의 개인기술과 스피드로 상대 블로킹을 따돌리는 방향으로 바뀐 것
국제대회
국제적 위상은 구기종목 준메이저 정도이다. 아시아, 유럽, 북중미 및 남미 국가에서 상당히 인기도 있고 강호급의 실력을 보여 준다. 올림픽에 정식종목으로 존재하는 인도어 스포츠 중에서 세계 보급률과 시청률 면에서 농구 뒤를 쫓아가는 종목.
그러나 국제무대에서 배구가 갖는 최대 약점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타 메이저 스포츠와 달리 강력한 자금과 선수풀을 가진 빅리그가 없다는 것이 약점이며, 특히 가장 확실한 스포츠 빅마켓인 미국 시장에서 부진하기 때문에프로리그의 파워가 다소 취약하다. 유럽에서는 이탈리아가 대표적인 빅리그지만, 축구, 농구, 야구 등 세계구기 빅리그보다는 자금이 부족하다. 러시아,폴란드 터키 등의 유럽 리그의 위상이 점차 오르고 있는데, 상당수 인기 지역이 축구, 농구와 겹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종목들과 달리 한국의 V-리그가 배구계에서는 상당한 자금력과 인기를 갖고 있다.
둘째, 비치발리볼이라는 대체 스포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치발리볼은 배구에서 파생된 종목이지만, 현시대 배구계는 비치발리볼 자체를 별개의 스포츠로 볼 정도로 성장했다. 비치발리볼 역시 국제배구협회(FIVB)에서 모든 경기를 주관하고 있지만, 테니스 ATP/WTA투어처럼 AVP투어가 존재해 오히려 6인제 배구와는 완전히 별개의 시장이 존재하는 종목이다. 아예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될 정도.특히 미국에서 비치발리볼 리그는 인기가 많으며, 미국 출신 선수들은 여름에 비치발리볼 상금 헌팅으로 돈을 벌고 겨울에 인도어발리볼을 알바 개념으로 뛴다.그런 이유로 본고장 미국에도 인도어 프로배구리그는 없다. 배구의 본고장임에도 미국 배구의 발전은 비치발리볼덕에 확산되었기 때문에, 미국 선수들은 굳이 인도어 리그에 미련을 갖지 않는 편.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등 비치발리볼을 즐길 대회나 장소도 많고, 여러 이유로 인도어 배구리그의 경쟁력이 약하기 때문에, 대다수 미국선수들이 여름에는 비치발리볼, 겨울에는 해외리그 알바라는 투잡 형식으로 선수생활을 한다. 다행히 미국도 2020 도쿄 올림픽 이전에 자국 프로배구리그를 창설할 예정이었고 결국 2021년에 리그를 출범했다.
미국에서 한 때 IVA(International Volleyball Association)라는 리그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운영된 적이 있었다. NBA 레전드인 윌트 체임벌린이 사무국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한 때는 배구선수로 잠시 리그(시애틀)에서 선수로 뛰기도 했다. 당시 소속팀은 이와 같다. 2018년도까지 프로배구리그를 출범시키겠다는 미국배구협회의 구상이 있었지만 지지부진했다. 2021년 2월 말, 새로운 방식으로 프로리그를 열었다. 팀 경기를 개인 경기로 전환시킨 셈인데, 팀 점수, 개인 점수, 팀 구성이 전통적인 방식과 완전히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