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싸움
강산은 팔도강산(八道江山).
산 높고 물 맑아 어디 아니 좋으랴만, 정녕 산자수명(山紫水明) 곱다란히 태고정(太古靜)에 묻힌 강산이야 강원도라 산골일레.
강원도(江原道).
동쪽으로 푸른 바다를 끼고 벼랑을 이뤄 우쭐우쭐 뻗친 산줄기는 태백산맥(太白山脈). 태백산맥은 서쪽으로 무수한 지맥(支脈)을 줄기 뻗고, 그 지맥은 또한 숱하게 엽맥(葉脈)을 내뻗어, 하늘 아래 봉우리만이 늘어선 장관을 이뤘다. 이 불쑥불쑥 솟구친 봉우리 아래, 바위처럼 담담한 사람은 있었고, 초가지붕은 있었고, 옹기종기 마을은 있었고, 태고의 고요가 고스란히 간직된 소박한 사랑도 있었다. 아무리 세월은 흘러도 한결같이 변함없는 몰골이야 의젓한 돌부처뿐이더냐.
암하고불(岩下古佛).
그 누가 이 고장 티없는 백성을 일러 암하고불에 비겼던가. 무딘 감자바위 아래 멍청히 선 말없는 부처님이여! 말이야 없지만도 그 가슴마다에 자비로이 어리석하게 후한 마음이야 다함없는 하늘 땅에 하무뭇이 넘쳤세라.
산 너머 또 산이요, 물 건너 또 물이로되, 오솔한 두메라도 나그네 가는 곳마다 순후한 인정이 있었다. 구수하게 구성진 노랫가락도 있었다.
산골의 귀물은 머루나 다래
인간의 귀물은 우리 님 허리
아리아리 스리 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얼씨구 놀다 가세
중국의 역사책인 《후한서(後漢書)》에도, 이 지방 사람들은 어수룩하게 공손하며 욕심도 없고 남한테 빌지도 않는 성품이라 했다.
그 옛날, 강원도에는 태백산맥 까마득한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동쪽에 예(江陵)나라와 서쪽엔 맥(貊春川)나라가 있었더란다. 저 유명한 단궁(檀弓), 맥궁(弓)의 원산지가 바로 이고장이었다. 활을 만드는 데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면서도,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로운 생활로 산과 들에서 짐승이나 좋으며 살았다.
이러한 사람들이 언제부터 동과 서로 갈려서 횃불싸움 같은 무지무지한 편쌈을 벌이게 되었는지, 참으로 활화산의 폭발같이 장려하다.
이른바 암하고불이라는 강원도 사람들이 벌이는 용감무쌍한 대대적인 집단 활동은, 자못 장쾌하고도 휘틋한 민속(民俗)이라 하겠다.
강원도는 나라의 동쪽에 있는 지방이라서, 다른 지방보다도 달뜨는 광경을 먼저 본대서 예전부터 특히 달을 좋아하고 숭배하는 풍속이 있었다. 그래서 음력 정월 대보름날(1월 15일)에는 달이 떠오를 때 횃불을 밝혀놓고 달을 향해 귀를 붙잡고 세 번 절을 하며 복을 비는 풍습이 있다.
이 달맞이 뒤에, 동쪽 마을과 서쪽 마을이 횃불을 가지고 싸우는 횃불싸움이 벌어진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대보름 둥근 달이 떠오르기 전이건만, 아이들의 노랫소리는 동산에 함함히 퍼져흐른다.
아이들은 홰를 들고 있었다. 홰는 싸리나무 또는 겨릅대라고 하는, 껍질을 벗긴 삼대에 관솔을 섞어서 단단히 묶은 다음, 쥘잡이로 손아귀에 알맞는 막대기를 꽂아서 엮는다. 이윽고 쟁반같이 둥그런 달이 뭉긋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산마다 봉우리마다 횃불이 밝혀진다. 횃불은 홰의 아구리에 검불을 넣어서 불쏘시개로 불을 붙이면 타기 시작한다.
황골 뒷동산 우뚝 솟은 월출봉(月出峰)에서는 풍물 울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메아리친다. 사람들은 횃불을 땅에 꽂아 세우고 달을 바라보며, 두 손으로 양쪽 귀를 붙잡고서 세 번 절을 올린다.
“올해에도 몸 성히 지내게 해주시게유.”
“올해에도 풍년이 들게 해주시게유.”
“올해에는 아들 하나 꼭 낳게 해주시게유.”
“올해에는 장가 좀 들게 해주시게유.”
누구나 중얼중얼 뇌까리며 꾸뻑꾸뻑 절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달은 인정스레 웃어주는 것 같다. “그래, 그래라! 너의 소원대로 되거라”하고, 고개를 끄떡끄떡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달빛은 대낮처럼 밝다. 월출봉 산마루에 모인 황골 젊은 패거리들은 더욱 신나게 꽹과리, 장구, 날라리, 소고, 징, 북을 울려댄다.
횃불은 온 산에 퍼져 있었다.
“술렁수-”
여러 사람이 목소리를 모아 을러댄다. 저쪽 높은터 마을 산봉우리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꼴래 꼴래- 황골 조팝벌레!”
응수하는 기세도 만만치가 않았다. 높은 산에서도 풍물은 진동하고 있었다. 횃불싸움의 서전은 벌어진 것이다. 횃불싸움은 ‘거화전(炬火戰)’이라고도 한다.
“예ㅡ띠 높은터 개백장!”
“황골 병신 머저리 덤벼라! 꼴래”
“높은 날도깨비 오너라! 쉬”
욕설은 오가고, 풍물은 그쳤다가 다시 발광하듯 들볶는다. 횃불은 이 산 저 산에서 번쩍번쩍 날뛰고, 고함치는 욕설은 서로 더욱 기승을 피운다. 대보름 밝은 달은 벌써 중천에 올랐다. 밝은 달은 잠자코 내려다보고 있었다.
봉우리와 산마루에서 함성을 지르며 욕설로 맞섰던 젊은이들은, 이마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횃불을 휘두르며 산줄기를 타고 점점 다가들기 시작했다.
“자, 오너라! 황골 골생쥐!”
“덤빌 테면 덤벼라! 높은터 똥강아지!”
산모롱이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황골 편에서 육모치기가 횃불을 뱅뱅 날쌔게 돌리면서 달려들었다. 높은 편에선 고슴도치가 내달아 횃불로 앞을 막고 덤빈다.
“우와”
일시에 횃불이 엉클어졌다. 활활 불타는 횃불덩어리가 종횡무진으로 난무한다.
“어이쿠!”
“엇, 뜨거!”
“아구구구…….”
횃불로 때리고, 지지고, 후리고, 찌르고, 던지고, 짓밟고, 넘어뜨리고…. 싸운다. 무지무지하게 싸우고들 있었다.
불이야! 횃불이야!
쫓기는 놈에, 쫓아가는 놈에, 쓰러진 놈에, 타는 놈에, 불을 끄는 놈에, 고함 지르는 놈에, 우는 놈에, 웃는 놈에, 뛰는 놈에, 기는 놈에………… 싸움판은 난장판이다. 이런 판에도 손을 살살 빌어 항복하는 사람은 내버려두고, 대항하는 사람과 항복하지 않는 자는 어디까지라도 쫓아가며 끝끝내 싸워 무찔러야 한다.
“꼴래 꼴래, 황골 꼴래-”
높은터 패거리가 쫓기면서도 놀리고 욕을 하는 것은 아직도 싸울 의기와 힘이 있는 까닭이다.
“예띠어 쥐방구, 팥방구, 날방구, 높은터 방구, 뽕! 뽕! 먹어라!”
황골 패거리도 입에서 쏟아지는 대로 놀림소리를 내뱉으며, 깡
뚱해진 횃불을 연상 휘둘러댄다.
“골 골 황골놈, 덤벼라 꼴래!”
“높은 지붕에 불 붙었다, 춤춰라!”
아옹다옹 입씨름에 화가 치밀어서, 또 한바탕 맞붙어 싸움이 벌어지고 나면, 그제야 양편의 횃불은 다 꺼져서 없어진다. 횃불이 없어지면 싸움은 저절로 그치고 마는 것이다.
양편에서 항복한 자들도 슬금슬금 자기 마을로 돌아가고, 심하게 다친 사람은 자기네 동네 사람들이 부축해준다. 횃불싸움은 항복하는 사람이 많아 세력이 약해 쫓기게 되는 마을이 패배하는 것이다. 이 편싸움에서도 진 편은 흉년이요, 이긴 편은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다.
황골 마을은 강원도 양구읍(楊口邑)에서 북쪽으로 10리쯤 떨어져 있는 대동리(大同里)이며, 높은터는 그 이웃 마을인 고대리(高垈里)로서, 이 두 동네는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는 으레 횃불싸움으로 겨루었다.
그러나 황골마을은 1943년 무렵 북한강 수력발전소 댐 수몰지구가 되어 호수 속에 잠겨버렸다.
이 횃불싸움은 다른 편싸움과 달리, 횃불을 가지고 싸우므로 대단히 위험하고 불상사가 많이 날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횃불에 머리를 그을린다든지 옷을 태우는 경우는 흔하고, 가벼운 화상을 입는 일도 있지만, 죽거나 크게 다치는 일은 별로 없는 것이다. 횃불 이외에 다른 기구를 가지고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횃불이 없어지면 씻은 듯이 싸움을 그치게 되는 것도 이 싸움의 특징이라 하겠다. 더구나 인가 근처에서는 행하지 않고, 마을에서 동떨어진 산이나 들판에서 행한다는 것 또한 특징있다.
《조선의 향토오락》 조사 자료에 의하면 1930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전국적인 분포로 횃불싸움이 행하여졌었다. 함경도 지방에서는 조짚으로 홰를 만들거나 또는 쑥대를 묶어서 홰를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송남잡지(松南雜識)》에 보면, 북관(北關)의 풍속으로서 견마전(馬戰)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서울 근방에서 행하는 횃불싸움과 비슷한 것이라고 한다. 서울 근방에서는 봉치[혼인 전에 신랑집에서 신부 집으로 보내는 채단(緞)과 예장(禮)]를 드리는 날 밤 신랑 신부 양쪽 집에서 각각 10여 명 내지 수십명의 홰꾼을 마주 내보내어 중로에서 횃불싸움을 행하는 풍속이 있었다. 횃불싸움에 있어서 한 가지의 철칙은 신부 편의 홰꾼이 얼마나 많든지 또 그 형세가 얼마나 강하든지 신랑측 홰꾼에게 반드시 지고서 달아나야만 된다는 것이다.
횃불싸움은 산이 많은 강원도 산골에서 가장 세차게 벌어졌는데, 한창 싸움이 고조에 달했을 때는 실로 만산평야가 횃불에 뒤덮여서, 전쟁이나 다름없는 장하고도 엄청난 광경을 이룬다.
차상찬(車相瓚)은 “횃쌈은 옛날 우리 조선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유행하던 풍속으로 팔도 각지에 대개 다 있었으나 내가 알기에는 강원도에서 가장 격렬하게 행한 것 같다”고 《조선사외사(朝鮮史外史)》의 <정월의 3대 놀이>에서 피력하였다.
이 횃불싸움도 오늘날에는 별로 볼 수 없게 된 민속인데, 석전(石戰)과 같은 남성들의 용감무쌍하고 집단적인 민중의 놀이였던 것이다.
참조 : 다리밟기
“횃불싸움” 에 하나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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